현실의 엄정한 원칙을 벗어나 인간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 전망하기를 가능케 하는 미적 차원은 산업사회에서 개탄스러울이만큼 문드러져 소생될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차대전 이후의 전후 모더니즘(Late Modernism) 유파에 있어서도 미적 차원은 철저히 배척되었고, 미적 감성의 마비 증세는 이제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현대 공학과 경제 구족에 의해 미적 차원이 압살되고 거부되는 이 사태를 풀러는 이름붙여 미적 위기라 한다. 이 위기에 직면하여 해결 방안을 찾는다면 그것은 당연히 미적 차원을 인간 능력으로서 소생시키고 사회적 실천으로서 실천해내는 일이다.
모더니즘 이전의 옛 작품에 대해 새로이 이는 관심과 평가, 장식을 비롯 솜씨 공방적 요소에 재대한 재인식, 자연미으 재평가 등은 단순환 감각 회복 이상으로 인간의 창의력을 되살리고, 그리하여 인간이 현실의 원칙에 대항하여 자율적인 잠재적 현실 공간을 설정하도록 하는 의의를 지닌다. 현실 원칙에 따른 현실과 대조되는 새로운 현실ㅇ르 조성하고 제공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예술은 이런 점에서 미적 차원을 위한 올바른 대안일 수 없다. 플러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거시적인 방향으로 흐르는데, 산업 생상과 미적 생산이 공동 보조를 맞추는 이중구조적 경제 체제 그리고 미적 형식이 자연 형식가 조화를 이루는 일 두가지로 요약된다.
자신이 제안하는 거시적 대안에 가까운 것으로서 풀러는 근자에 들어 논란이 되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들고 있다. 그러나 풀러가 포스트 모더니즘을 거론하는 까닭을 대충 유추할수 밖에 없을만큼 석연치 않을수 있고 에세이적인 어조와 사유흐름으로 말미암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해석도 사실 난삽할 수도 있다.
용어로써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1950년대 말부터 간헐적으로 선보였고 60년대말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예술사에서 궅이 시대 구분을 하자면 1960년대 이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기로 명명될수 있고, 그 이전 즉 모더니즘 발생기인 1860 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를 모더니즘의 시기로 그리고 1940년대 이후 1950년대까지를 전후 혹은 말기 모더니즘(Late Modernism)의 시기로 명명하곤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장식과 의장을 수용하고 고급예술과 저속예술 그리고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을 뒤섞어 사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문화의 다원주의를 겨냥하고 예술품의 대중적 확산을 중시하다. 이에 따른 필연적 결론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엘리트 예술이 부정될뿐더러 모더니즘이 고수했던 매체와 장르의 순수성을 파괴하여 장르 고유의 영역들이 서로 혼합되는 현상을 조성한다.
예술목적으로서의 순수성. 자기비판적 형식주의 분업적 준문성, 형식적 법칙, 독창성과 저작권, 박물관 식으 맥락에 기울었던 모더니즘을 포스트 모더니즘이 후기 산업사회의 기술공학에 의거하여 부정하고 후기 산업사회의 표면적 현실에 부합하는 예술 유형을 원했다는 것은 얼핏 호소력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후기 산업사회의 모순을 천착할수록 포스트모더니즘의 소박한 사회인식과 안일한 예술 방향이 드러난다고 할 적에 포스트모더니즘은 풀러가 자인하듯이 신보수주의가 예술을 매개로 모습을 달리한 것이라고 지적해야 옳다. 다심라해 한편으로는 녹색혁명, 전자정보공학의 확산, 미디어산업의 융성, 다른 한편으로는 다국적 자본주의와 신제국주의를 향한 전환기인 1960년을 전후해서 상품생관과 예술 양식의 실험을 연결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정보를 소비하는 것처럼 예술품도 소비하는 소비형태의 다국적 자본주읭와의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밀접한 연관성이라는 것은 양면적인 의미를 지니는바, 포스트 모더니즘 스스로 다국적 자본주의의 수단과 매체를 활용하려 했다는 의미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다국적 자본주의의 소비 행각에 종속되어 반동으로 화해 버렸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새 시대에 적합한 형식을 추구한다는 기치 아래 전통과의 결별을 선언한 모더니즘은 원래 부르즈와 문화 질서에 그리고 그릇된 문화 질서에 맞서 싸운 대항문화로 출발했다. 그러므로 모도니즘에 있어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며 미래와 미지의 것에 대한 갈망 및 현재에 대한 찬미가 중시 될 수밖에 없고, 달리 보면 과거라는 것은 추상화되기 마련이고 결과적으로 역사의 연속성을 파괴하는 도피심리가 지배하게 된다. 그렇지만 지금의 이순간을 간주하는 면에서 보아, 모더니즘이 전혀 비역사적인 것이라고만 매도한다면 그것은 모더니즘이 전혀 비역사적인 것이라고만 매도한다면 그것은 모더니즘을 일정부분 재평가해주는데, 하버마스가 중요시하는 것은 모더니즘 자체가 아니라 모더니즘에 내재한 모더니티(moder-nity, 현대성)이며, 이에 논거를 두고 하버마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오류를 통렬히 비판한 바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리오따르와 모더니즘의 주관주의를 비난하는 다니엘 벨은 후기 산업사회의 과학적 추세를 인정하는 입장에 선다, 특히 리오따르는 후기 산업사회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일시하고 이 둘을 동등하게 긍정한다. 그럴 적에 후기 산업사회에 와서 자본주의의 모슨은 해소되었고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 방향도 타당한가 라는 의문이 촉발되지않을수 없다.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에 컴퓨터가 국제화한것을 두고 과거의 과학적 패러다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패러다임에 의해 평가해야한다고 말한다면, 짐작되다시피 이는 후기 산업사회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오호하는 입장에서 나올수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컴퓨터사회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참신한 자율성 그리고 나름의 (풀러의 희망처럼) 잠재적 공간이 침해당하지 않고 조송되고 있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는 후기 산업사회의 모순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보수주의 색채가 한결 뚜렷한 실체로서 부각되고 마는것이다. 후기 구조주의도 이 점에선 마찬가지다.
장르들의 영역이 변하거나 혼합되고 형식적 폐쇄성이 흐물어지며 작위성이 거부되고 복고풍이 만연하는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식적 특질로서 모더니즘과 의 차별성으로 수용된다, 그러나 특히 장르들의 영역 와해나 혼합현상을 포스트 모더니즘만의 속성으로 보기느 어렵고 더구나 복고풍으 양식과 모작 그리고 정신분열적 기법은 문화예술을 소비하는 소비자본주의사회의 맞적 무능력을 반증하는 것일 따름이다. 소비가 고도화되다 못해 서비스 부분마저 공업화한 이 소비자본주의사회은 새로운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삼단계적 양상에 해당한다고 지적 된다. 세계와 역사를 거시적으로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안목을 상실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시 말해 '노쇠한 모더니즘의 파산선고'이고 거꾸로 보면 '변혁 의지가 거세된 모더니즘의 또 다른 모습'인 동시에 모더니즘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던 특질들이 주도적인 특질로 자리잡은 '또 하나의 모더니즘'이다.
핼 포스터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모더니즘을 거부하고 현상을 찬양하는 반동의 포스트모더니즘이며, 또 하나는 모더니즘을 해체하고 현상을 거부하는 저항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반도으이 포스트 모더니즘은 안티모더니즘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저항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동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갈라 놓으며 그리고 모더니즘에 으해 무시된 인본주의적 (휴머니스트)전통을 보존하거나 복원하려 한다. 저항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공식문화와 반동적 포스트모더니즘의 그릇된 규범에 대해 저항하고 전통을 비판적으로 해체하려 하는 동시에 문화적 약호를 의문시하며 사회정치적 제휴를 천착해 나간다. 차이는 있긴 하지만 , 반동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저항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버마스는 모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미적 모더니티의 위기 해소는 체제가 강요하는 도구적 합리성에 으해 마멸된 미적 합리성을 거시적인 차원에서 되살릴 적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다니엘 벨이 모더니즘을 합리주의에 대해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한 사실을 부정하고 또 벨이 모더니즘에 대한 대안으로 종료를 거론한 사실을 두고 모더니즘에 대해 공공연한 비난으로 일관한 신보수주의자라고 비난한다. 문제는 모더니즘에 있다기보다는 체제의 통제에 종속되는 개인을 양산하는 현대화의 착오에 있으므로, 문외한을 예술 전문가로 만드는 일이나 예술품 소비자를 보다 능력있게 교육시키는 이은 일면적이며 단편적이기 마련이라느 ㄴ것이 하버마스의 전제로서, 이와 연관하여 더구나 예술과철학의 비칠법하지만 그것은 바로 예술의 독자성을 상살하는 길과 다름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고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역사적 인실론의 불화에 처해 필요한것은 역사 상황을 포괄적으로 접근하는 문화적 모더니즘이며 여기서 예술은 넓은 의미의 예술로 환원되고 전문적인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삶속에서 무르녹는 예술만이 삶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소통적 합리성과 미적 합리성을 일깨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힐튼 크레이머의 진단을 들어 보자, 포스트모더니즘이며 여기서 예술은 넓은 의미의 예술로 환원되고 전문적인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삶속에서 무르녹는 예술만이 삶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소통적 합리성과 미적 합리성을 일깨울수 있을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힐튼 크레이머의 진단을 들어보자. 포스트모더니즘은 쾌락주의적이며 기회주의적이고 도구적 합리성마저 극복해낼수 없다.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개인의 가치가 대립한다고 하면, 개인의 가치는 위기에 처하든지 무화된다, 일상적 소통구조가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아도르노느 ㄴ예술과 미적 지각이 우리가 걸어 볼수 있는 유일하 희망이라고 한다. 예술에서의 새로운 전략이 요청되는 것은 필연적이며 그것은 예술 자신의결백성을 강조하는 일로 충족될 것이 아니며, 예술의 결백성 옹호는 저와 같은 대립을 해소할수 있는 출발점에 불과 하낟. 예술과 삶의 융합은 예술의 일방적 창작 그리하여 일방적 수용(창작자에게서 향유자에게로)으로서는, 그리고 예술작품-창작자-감상자의 테두리 냉에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개인의 가치가 더욱 위기에 처하도록 하는 방편일 수도 있고 모더니즘의 한계는 여기서 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감상이라는 개념이 대체로 창작자-작품-감상자 상호간의 거래 관계에 국한되는 틀을 탈피하여 현실-창작자-감상자-현실이 라는 포괄적인 틀이 설정되어야 하며, 이 틀 내에서 현실-창작자-부분뿐만 아니라 감상자-현실 부분도 중시되고 천착되어야 한다. 이 두부분이 균등하게 받아들여진다면 감상자의 행위도 실천, 여타 실천과 구분하여 심미적 실천 이라 불러야 하고 감상 행위는 실천 일반의 지평에서 적극 구명되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 모더니즘이라 하는데, 모더니즘의 새로운 양상 혹은 그 발전적 계승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면 후기 모더니즘이라 부르는 게 납득이 가지만, 모더니즘의 부정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면 탈脫 모더니즘이라 부르는게 나을 것이다. 아직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이어서 상반된 입장이 드러나는데, 어디다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호칭 부여는 달라질 것이다. 국내에서는 논의된지 얼마되지 않은 형편임을 고려하여 그냥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하였음을 양해 바란다.